비스포크 수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가봉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완벽한 패턴의 수트도 실제 고객의 체형 위에서 보정 과정을 거쳐야만 하죠.
재단사의 역할은 고객 신체 치수를 바탕으로 개별 고객의 옷 本이 되는 패턴을 제작하는 작업과 이를 2차원적인 원단 위에서 커팅을 하는 능력 그리고 올바른 가봉옷을 제작하여 이를 고객의 신체 위에서 보정하는 과정을 모두 소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경중을 따질 수야 없지만 저는 가봉을 볼 줄 아는 능력과 가봉 과정에서 발견한 보정 내용 등을 다시 반영하여 수정하는 작업을 재단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패턴을 제작하여 원단을 자르는 능력이야 소위 말하는 '테일러 아카데미'(특정 상호를 말하는 것이 아닌 아카데미 전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와 같은 학원식 교육을 통해서 단기간에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봉을 볼 줄 아는 것은 교과서적인 이론 교육을 통해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영역이라 실제 현장을 통해서만 습득이 가능한 과정입니다.
때문에 가봉을 본다는 것은 의사가 환자에게 '올바른 처방'을 내리는 과정과 동일한데 이 처방이 잘못되면 환자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듯이 옷의 완성도에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영역입니다. 자신을 '테일러'라고 칭하는 젊은 테일러들이 '아카데미'를 졸업하여 자신은 우수한 아카데미를 이수한 능력자라고 치부하지만 사실은 현장에서 수많은 체형의 고객을 맞닥뜨리는 순간 이론과는 다른 현실의 벽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는 의사들도 마찬가지일텐데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아툴 가완디 저, 2003> 이라는 책을 보면 저자는 수많은 외과적 수술을 학부 과정이나 레지던스 과정에서 심지어 의사 면허 취득 후에도 마스터할 길은 오직 실제 환자를 통해서 계속되는 실습을 행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실제 환자가 실습의 대상이 되는 것이죠)
이 테일러라는 영역도 이와 비슷합니다. 안타깝게도 숙련된 테일러는 어느 나라에서 어느 스승을 통해서 교육을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체형의 고객을 다루어봤고, 무수한 데이터 베이스를 가지고 취사선택 및 응용할 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 포스팅을 보고 계신 여러분들께서는 인터넷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에서 수많은 가봉 사진에 대한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수트를 제작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과정인 이 가봉 과정에 대한 사진을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좋은 테일러샵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우실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봉 사진에는 개별 테일러샵의 옷을 만드는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며 가봉을 보는 과정, 완성된 가봉 수트를 통해서 해당 테일러샵의 기술 수준과 옷을 대하는 생각이나 운영 철학 등을 모두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이 때문에 저는 가봉 수트를 옷의 '청사진'이라고 생각하며 마치 인간의 DNA와 같이 많은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개별 테일러샵에 대한 많은 것들을 해석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이 좋은 테일러샵을 선택하고자 한다면 가봉 보는 사진을 눈여겨 봐주세요.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듯이 가봉옷은 참으로 놀랍게도 해당 테일러샵이 모르게 그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그대로 노출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인테리어나 규모, 오염된 웹상에서의 수많은 광고성 글들을 보면 모두가 다 최고의 테일러샵입니다. 하지만 DNA를 숨길 수 없듯이 각 테일러샵에서 만드는 가봉 수트를 비교해보고 가봉 과정에 대한 사진을 꼼꼼하게 분석해보신다면 조금이나마 읽으실 수 있습니다. 그 샵의 생각을...(자세히 보고 또 본다면 분명히 읽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니 이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판단의 몫을 맡기고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그런 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차이가 결과를 다르게 가져오죠. 비스포크 수트는 가봉 과정만 잘 봐도 그 옷을 만드는 사람들의 생각과 옷을 대하는 자세와 철학이 보입니다.
우리가 가봉옷을 눈여겨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감사합니다.